본문 바로가기

뉴스

오늘의 역사 - 7월 4일(강화도 해병대 총격 사건)

728x90
반응형
SMALL

안녕하세요. 이번 soso HAN story에서는 7월 4일에 일어난 사건사고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다섯번째 강화도 해병대 총격 사건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11년 7월 4일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위치한 해병대 제2사단 8연대 81대대 소속 선두소초에서 주범 상병 김민찬이 동료 해병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해병대원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입니다.

참고로 편의상 '총기난사'라는 익숙한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범인 김민찬 해병은 그냥 마구 난사한 게 아니라 평소 앙심을 가지고 있던 같은 생활관(B동 2생활관)의 동료 해병대원들을 노리고 그들에게 한 명 한 명씩 차례로 조준 사격한 것이므로, 엄밀히 말하면 총격 사건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2011년 7월 4일 오전 7시 30분, 피의자 김민찬 해병(상병)은 사건 이틀 전 해안초소 경계근무 중 편의점에서 소주 2병을 구입해 창고에 몰래 숨겨둔 것 중 한 병을 마셨습니다.

오전 10시 30분, 김민찬 해병은 잠이 깨서 나온 정준혁 해병(이병)과 창고에서 만나 대화하면서 "권승혁 해병(일병)을 죽이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정준혁 해병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렸으나, 잠시 후 "소초원들을 다 죽이고 탈영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들은 "지금 죽이자"면서 함께 창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전 11시 20~35분 경, 김민찬 해병은 상황실에서 상황병인 L 해병(상병)과 대화를 나누며 기회를 엿보다가 근무자들이 상황실을 비운 틈을 타서 상황실 내 총기보관함과 간이 탄약고에서 (K2 소총 1정과 실탄 75발과 공포탄 3발, 수류탄 1발)이 담긴 탄약통을 탈취하였습니다. 상황부사관인 H 하사가 고가초소 교대 근무에 투입될 근무자에게 소총을 지급하기 위해 총기보관함을 열었는데 총기보관함을 그대로 열어 놓은 채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상황실을 비웠으며, 상황병인 L 해병(상병) 역시 상황실을 비우자 그 사이에 김민찬 해병은 상황실에 있는 총기보관함에서 병기를 탈취하고 간이탄약고의 탄약통도 들고 나온 것입니다. 탄약통의 열쇠는 상황실 근무자인 K 해병(일병)이 열쇠를 조끼 윗주머니에 넣어둔다는 것을 김민찬이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걸어 놓은 조끼 주머니에서 쉽게 꺼낼 수 있었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정준혁 해병에게 수류탄 1발을 주고 고가초소를 폭파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오전 11시 40분경, 김민찬 해병은 생활관으로 가서 공중전화 부스 옆에서 이승렬 해병(상병)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상황부사관 H하사는 쓰러진 이승렬 해병을 발견해 11시 42분 쯤 119에 신고했습니다.

한편 당초 범행을 공모했던 정준혁 해병은 막상 총소리를 듣자 겁이 나서 고가초소 폭파를 실행하지 않고 가해자 김민찬을 피해 도망다녔습니다. 정준혁 해병은 이승렬 해병이 쓰러져 있음을 목격한 뒤 고가초소 근무자에게 이를 알리고 나서 계속 김민찬 해병을 피해 다녔습니다.

계속해서 김민찬 해병은 부소초장실 입구에서 부소초장 이승훈 하사(25)에게 소총을 발사했습니다.

 

 

이어서 그때 6명이 잠자고 있던 제2생활관으로 들어가 좌측 첫 번째 침상에서 잠을 자던 그가 정준혁 해병에게 제일 죽이고 싶다고 말했던 권승혁 해병(일병, 20)의 가슴에 3발을 발사했으며, 그 다음으로 우측 첫 번째 침상에서 자던 박치현 해병(상병, 21)에게 1발을 쏘았습니다. 이에 권승혁 해병은 바로 즉사했으며 박치현 해병은 즉사하지 않고 중상을 입은 채 살아 있었으나 나중에 도착한 소방서 구급대원들에 의해 병원으로 호송되던 중에 사망했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계속해서 총을 쏘려고 다음 차례인 좌측 두 번째 침상에 누워 있던 권 모 해병(이병)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권 모 해병은 먼저 김민찬 해병이 다른 해병들을 쏠 때의 총소리를 듣고 이미 깨어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김민찬이 자기 쪽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달려들어서 왼손으로 총부리를 잡아 아래쪽으로 꺾고 오른손으로 개머리판을 잡은 뒤 총을 완전히 빼앗으려고 상호간에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으나, 멜빵이 걸려 있는 데다 김민찬 해병이 완강히 버텨서 결국 총을 빼앗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가슴을 밀어서 김민찬 해병을 문 밖으로 밀쳐내고 문을 닫은 다음 침대를 밀어 문을 못 열게 막았습니다.

전입 온 지 겨우 보름밖에 안 된 권 해병이 목숨 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평소엔 해병 정신을 그렇게 강조하던 방 안의 나머지 생존 선임 해병 세 명은 방구석에서 떨고만 있었으며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나서지 않았습니다. 권 해병이 총을 뺏지 못한다면 다음으로 총알세례 받을 차례는 바로 자기들일 테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같이 달려들어서 총 뺏는 걸 도와주는 게 당연했는데도 방 안에 있던 선임들은 겁에 질려 바짝 얼어서 꼼짝 못하고 뒷구석에서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게다가 권 해병이 이미 총부리를 잡고 밑으로 꺾어서 총구가 아래로 향한 상태에서 뺏으려고 몸싸움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민찬이 전방에 총을 맘대로 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바로 방 안쪽에 있던 선임 해병들이 달려들어서 같이 힘을 합하면 어렵지 않게 총을 뺏고 범인을 제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권 해병과 김민찬 해병이 둘 다 양손으로 총을 잡고 서로 안 뺏기려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니까, 즉 범인인 김민찬 해병도 총을 안 뺏기려고 잡고 있는 거 외에는 손을 다른 데 쓸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사이에 다른 해병들이 옆에 다가와서 쉽게 그 총의 탄창을 빼고 조정간 안전으로 돌려 놓기만 했어도 사실상 게임 끝이어서 그 다음은 맘 놓고 쉽게 총을 뺏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방 안의 어떤 해병들도 전혀 도와주지 않고 그저 방 구석에서 꼼짝도 못하고 패닉 상태에서 덜덜 떨며 싸움을 보고만 있었다는 건 한심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후술하는 빤스런보다도 이 부분이 이 사건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선임 해병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결국 권 해병은 총을 뺏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범인이 아래쪽으로 총을 발사해서 하반신에 총알을 맞고 맙니다. 만약 1~2명의 도움만 있었어도 권 해병이 중상을 입는 비극 없이 마무리되었을 것입니다.

총을 뺏으려는 권 해병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김민찬 해병 둘 간의 팽팽한 몸싸움이 계속되던 와중에 아래쪽으로 총이 발사되어 권 해병의 하반신에 네 발의 총알이 스쳤습니다. 다행히 뼈나 치명적인 부위를 건드리지 않아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한 쪽 고환에 총상을 입었고 뜨거운 총신을 맨손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에 손에는 수포가 생기는 화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권 해병이 피의자 김민찬 해병을 생활관 밖으로 밀어낸 뒤 문을 닫아 잠그고 나서야 쓰러졌고 하체에 피가 철철 나는 것을 깨닫고는 피 흘리는 자신에게 지혈을 해 달라고 주변 선임 해병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임 해병들은 지혈 방법을 모른다며 회피하기만 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스스로 옷을 찢어 지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건 후 권 해병의 아버지는 해병대 가족모임 카페에 올린 글에서, '권 해병이 총을 빼앗으려 몸싸움하고 있을 때 뒤에 있던 선임 해병들 중에 한 명만 도와줬어도 총을 빼앗는데 성공했을 테니 권 해병이 총에 맞아 고환이 터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런 한심한 선임들이 그동안 고참이랍시고 권 해병에게 과자를 토하도록 먹이는 등 괴롭히며 전통이니 뭐니 하고 떠들었다는 게 분통이 터진다'면서 해병대 선임들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부대 해병들 중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군인다웠던 사람이 실무(자대) 배치받은 지 보름밖에 안 돼서 가장 해병대 물이 덜 든 권 해병이었다는 게 해병대의 씁쓸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후 김민찬 해병은 생활관 바로 옆의 창고로 이동해서 공모자인 정준혁 해병을 만났습니다. 정준혁 해병이 약속과는 달리 고가초소를 폭파시키지 못한 것을 안 김민찬 해병은 동반자폭하기 위해 정준혁 해병으로부터 수류탄을 빼앗아 터트렸고 다리, 등, 얼굴 등에 파편상을 입고 쓰러졌으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습니다.

정준혁 해병은 곧바로 달아났으며, 수류탄 파편에 의한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던 김민찬 해병은 이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낮 12시 15분, 인천강화소방서 길상구급대 임동문 소방교 등 6명이 신고를 받고 출동하여 부상자들을 이송했습니다.

한편 총격이 일어난 2생활관이 아닌 다른 생활관들에서 쉬고 있던 해병들은 총소리를 듣고는 놀란 나머지 생활관 밖으로 뛰쳐나와서 부대 밖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부대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속옷만 입은 해병들이 소초에서 뛰쳐나와 부대 앞 해안도로와 민가 쪽 등 여기 저기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고 합니다.

마초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해병대는 이 '빤스런' 사건으로 인해 큰 조롱과 굴욕을 겪었는데, 심지어 2022년에는 바리깡으로 음모 밀고, 유듀에 빨래집게 등 성고문까지 발생해 더욱 이미지가 추락했습니다. 특히 가해 병사 중 한 병장은 며칠 뒤 전역이라며 또다른 의미의 빤스런을 꿈꿨습니다. 모병제는 자신의 직장인 만큼 선후임과 계속 얼굴 볼 사이이고 진급을 위해 내부의 평판도 신경써야 하고 사건이 터지면 짤릴 위험도 있어 후임을 괴롭혀도 적당히 군기 잡는 선에서 괴롭히지만, 어차피 전역일만 채우면 '빤스런'하고 두번 다시 얼굴 볼 일 없는 징병제에서는 '잃을게 없는' 선임들의 통제가 안 되는 가혹행위가 많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의 유일한 '영웅'으로서 그나마도 해병대의 자존심을 지킨 용맹한 '권 모 해병(이병)' 역시 토할 때까지 과자 먹이기 등 막장 가혹행위에 시달렸는데 이 사건의 가해자가 동료에게 '전우애'가 아닌 살의를 품게 된 근본 원인도 부대 내의 그릇된 가혹행위였습니다. 

 

총 4명의 해병대원들이 사망했습니다. 이승훈 하사, 이승렬(상병), 권승혁(일병) 해병 3명은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박치현 해병(상병)은 현장에선 살아 있었으나 강화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은 후 헬기로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도중 숨졌습니다. 박치현 해병은 사고 하루 전이 생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미니홈피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는 댓글이 줄이어 달렸습니다.

또한 사망자 중 권승혁 해병은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전 멤버인 은지의 외사촌 동생이고 이승렬 해병은 개그맨 임혁필의 고종사촌 동생이었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피의자 김민찬 해병과 김 해병의 총격을 적극적으로 막았던 권 해병까지 총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권 해병은 하반신에 4발의 총상을 입었으며, 고환이 하나 터져서 병원에서 이를 적출하고 봉합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한 개만 상실했기에 생식 능력엔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PTSD 등의 후유증을 얻었다고 합니다. 

 

초기에는 언론에서 총기난사 사고라고 불렀으나 수사 결과 인위적인 사건임이 드러났습니다. 네티즌 사이에서 '김민찬 해병은 평소엔 군 생활을 잘 했다'는 증언, 전역을 9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총기를 훔칠 정도의 대담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아 부대에 원한을 품고 계획되었던 행동이 아닐까라는 추측, 김민찬 해병이 다른 부대에서 지금 부대로 옮겨온 사람인데 문제가 있어서 온 게 아니냐는 추측만 무성했지만 실상은 훈련소에서 실시한 인성 검사에서 7가지나 되는 정신과적 문제가 제기되었는데도 해병대 측에서 귀가 시키지 않았고 일일정찰 도중 해변에 죽어 있는 물고기를 대검으로 난도질하는 등 김민찬 해병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음이 부대원들의 증언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해병대 전역자들은 넷상에서 사건의 원인이 기수열외일 것이라는 의견을 많이 내놓았는데 이는 실제 사건 수사 결과와도 일치합니다. 이 사건은 비슷한 양상을 보인 530GP 사건과 달리 '후임'이 '선임을 목표로' 삼지 않고 반대 양상을 보였고, 김민찬 해병은 구타, 왕따, 기수열외는 없어져야 한다고 직접 진술했습니다. 사고조사관과 범인 간 필담에서도 마찬가지 진술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었고 후에 기수열외는 없었다고 김민찬 해병 스스로 번복진술했습니다.

김민찬 해병의 사물함에서 3페이지 가량의 편지 형식의 메모와 유서 형식의 메모지가 발견되었는데, 자신을 비관하는 내용이었으며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민찬은 매우 불행한 인생을 살아 온 인물이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따돌림에 시달렸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동급생들에게 성적 학대와 상습 폭행을 당했습니다. 부모와 의논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에겐 가정 역시 치유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폭력의 트라우마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내가 나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힘을 기르기 위해 해병대를 자원했지만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국군교도소 교도관들이 입을 모아 "민찬이는 군대에 갔기 때문에 사형수가 됐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김민찬은 군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구타와 욕설은 물론이고 성적 학대까지 수시로 당했습니다. 7번이나 전출을 요구했지만 모조리 묵살됐습니다. 그러다 그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나마 김민찬의 인생에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준 존재였습니다. 그런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온 날 김민찬이 본 것은 선임들이 자신의 군모에 소변을 담아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습니다.


김민찬 해병은 입대 전 정신과 진료나 정신병력은 없었으나 인성검사 테스트에서 7가지나 되는 정신과적 문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부대에서는 관심사병으로 분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훈 하사가 기수열외와는 겉보기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인다며 이 하사가 사살되었다는 건 김민찬 해병이 범행에 장애물이라 판단해 사살한 것으로 보고 총격 사건 자체가 기수열외로 인한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증거라는 의견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김민찬 해병은 이승훈 하사는 사살했지만 소대장인 중위에게는 사살하기는 커녕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난 뒤 수류탄으로 자해를 시도하였습니다.

피해자 권승혁 해병의 유족들은 기수열외에 대해 부인했습니다. 권승혁 해병의 아버지인 권형구 씨는 사고의 가해자인 김민찬 해병이 자신의 아들을 상습적으로 괴롭혔으며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성희롱적 발언을 들었다고 아들에게 들었고 거기에 권승혁 해병은 오직 김민찬 해병 하나 때문에 군생활이 힘들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사실은 권승혁 해병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당시 육군 하사로 복무 중이던 권승혁 해병의 친형도 알고 있었습니다.

한편 국방부 합동조사단은 사건 이틀 후인 2011년 7월 6일 새벽 1시 쯤에 정준혁 해병이 김민찬 해병과 사전에 범행을 모의한 정황을 포착하여 범행공모 혐의로 정준혁 해병을 체포하였습니다. 정준혁 해병은 구타를 없애기 위해 사고를 친 뒤 탈영하자고 뜻을 모았지만 실제 범행에는 가담하지 않았는데, 합동조사단이 허술한 무기 관리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준혁 해병의 혐의를 파악했으며 가해자인 김민찬 해병이 부대 상황실 내 탄약고에서 총과 실탄을 훔칠 때 정준혁 해병이 자신을 도왔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 조사 내용에 따르면 김민찬 해병이 2011년 7월 4일 오전 10시에서 10시 20분 사이에 상황실 내 총기보관함에서 K2 소총을 훔치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간이탄약고에서 실탄 75발, 수류탄 1발 등을 훔쳤으며 이 과정에서 합동조사단은 정준혁 해병이 김민찬 해병을 도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준혁 해병은 공모혐의에 대해 부인했지만 두 사람 모두 사건을 벌이고 탈영하는 데 뜻을 모았다는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2011년 4월 9일 부대에 배치된 정준혁 해병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부대원들이 정준혁 해병을 왕따시키면서 성경을 태우거나(종교 경전 소각 정도면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사유다!) 담뱃불로 몸을 지지는 등의 가혹행위를 가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때문에 비슷한 왕따 신세인 김민찬 해병과 평소 친하게 지냈으며 사건 당시에는 김민찬 해병에게 수류탄을 건네받아 근처 감시초소를 폭파시키려 했으나 막상 총소리를 듣자 겁을 먹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포기했다고 진술했습니다.

이처럼 쉽사리 총기와 탄약이 도난당한 것은 허술한 탄약고 관리 체계 때문이었습니다. 관리 담당인 상근예비역 김 모 해병이 퇴근시 탄약고 열쇠를 상황실에 반납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근무시에 착용하는 옷에 넣어놓고 퇴근한다는 것을 안 김민찬 해병은 김 모 해병이 퇴근 후 그 열쇠로 탄약고에 침입해 실탄과 총기를 꺼낸 것입니다. 

 

피의자인 김민찬 해병은 김포 우리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은 뒤 국군수도병원을 거쳐 국군대전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바로 구속 조치되어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부대원들도 죄다 헌병대로 불려가 가혹행위가 있었는지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재판 결과 김 해병에게는 사형이 선고됐습니다. 재판부는 김민찬이 가혹행위를 당한 것을 상당 부분 인정했지만, "비정상적이고 고질병적인 해병대 문화와 허술한 총기관리 실태는 양형의 문제로 해결할 부분이 아니다"라며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한편 정 해병에게는 징역 10년이 선고되었으며 2013년 1월 24일 대법원에 의해 판결이 확정되어 국군교도소  대한민국 법무부 소속 일반 일반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정 해병은 2011년에 구속되었으니 2021년에 출소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로써 사형이 확정된 군 사형수는 김 해병을 합쳐 총 4명(육군 3명, 해병대 1명)으로 나머지 3명은 530 GP사건의 주범 김동민과 1996년에 역시 총기난사로 3명의 육군 병사를 살해한 김용식,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임도빈입니다. 이들과 정 해병은 6년 이상의 징역을 선고받을 경우 병적에서 제적된다는 병역법 3조에 따라 병적에서 제적되었습니다. 다만 군인 신분일 때 형을 선고받았으므로 총살형을 집행해야 하기에 집행 명령이 나올 때까지는 민간인 신분이 되었더라도 법무부 교도소가 아닌 총살이 가능한 유일한 시설인 국군교도소에 수감됩니다.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