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soso HAN story에서는 7월 4일에 일어난 사건사고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 두번째 2차 세계대전 쿠르스크 전투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독소전쟁 중 1943년 7월 4일~1943년 8월 23일까지 쿠르스크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과 나치 독일 간의 전투.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 이후 형성된 쿠르스크 돌출부를 포위하려는 독일군의 시도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이 전투는 독일의 마지막 동부전선 대공세였으며, 동시에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서서히 소련군의 우세로 넘어가던 동부전선의 승패를 확정지은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기갑전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이후 동부전선에 공세를 펼칠 역량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처참한 패배 이후 독일 국방군은 캅카스에서 전면 후퇴를 결정한 이후로 소련군의 공세에 족족 밀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독일군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소련군을 저지하는데에 성공했고 이후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으나, 그 과정에서 쿠르스크 지역에 남북으로 250km, 동서로 160km에 달하는 거대한 돌출부가 형성되어 독일 소련 양측의 크나큰 이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 돌출부를 포위하는 성채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원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계획에 따르면 성채 작전은 5월 3일에 게시되어야 했으나 완고한 소련군의 방어에 맞추기 위해 독일군은 2달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공격을 미뤄야 했습니다. 소련군은 독일군이 여름 중으로 쿠르스크 돌출부에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으며 소련군 총 인력의 40%와 기갑 부대의 75%를 쿠르스크 지역에 투입하였습니다.
7월 4일 성채 작전이 게시되고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북쪽과 남쪽 두 군데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북쪽에서의 공격은 시원찮았으나 남쪽에서는 양측 모두 상황이 급박해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3제곱킬로미터 불과한 지역에 수백대에 전차가 뒤엉키며 서로에게 포화를 내뱉는 아비규환이 벌어졌으며 양측 도합 약 700대 이상의 전차가 파괴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진격에 실패하고 주저앉았고 소련군 또한 방어에 성공했으나 역시 진격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와중 7월 10일 시칠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하며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히틀러는 이를 막기 위해 병력을 남부 유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고 7월 13일, 성채 작전은 공식적으로 취소되었습니다. 이후 소련군의 반격이 8월 23일까지 이어졌으며, 독일로부터 벨고로드 시와 하리코프 시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하며 쿠르스크 전투는 끝을 맺게 됩니다.
흔히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전투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는 달리 역사상 최대 수준의 기갑, 항공 전력이 동원된 가장 규모가 거대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의 일부인 쿠르스크 남부, 오보얀 쿠르스크 북부에서 일어난 프로호로프카 전투는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자 최대의 전차전이기도 하였으며 1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일 전역에서 양 군의 병력 약 200만, 전차 약 6,000대, 항공기 약 4,500대라는 가공할 전력이 충돌하였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도권 전환의 시발점이였다면, 쿠르스크 전투는 전쟁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였음을 확인시켜준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을 제대로 격파할 수 없었으며 도리어 소련군의 반격에 주요 도시들을 탈환 당하는 등 앞으로 두번 다시는 동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공세를 이어나갈 수 없게 됩니다.
소련군은 첩보로 독일군의 공세목표가 쿠르스크라는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군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기 위해 가공할 규모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쿠르스크 지역이 돌출부라는 것 자체가 적의 선제 공격 목표가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의 승리와 스탈린그라드 승리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독일군에게 대규모 선제 공격을 할 생각을 또 품었지만,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와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이 겨우겨우 설득하여 이전같이 쓸데없는 재앙을 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방어전의 주력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의 중앙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즈 전선군에는 엄청난 전력이 보강되기 시작했습니다. 쿠르스크 일대에는 민간인 30만명을 동원하여 총 3,000마일이 넘는 참호와, 종심이 175km에 달하는 6중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여기에 무려 40만 개가 넘는 지뢰매설, 가짜 공군기지 50개와 비행장 150여 곳 건설, 그리고 말뚝 전차 장애물도 구축되었으며 포병의 우세를 중시하는 소련군답게 야포가 약 13,000문, 920대의 카츄사 다연장 로켓을 배치했습니다.
또한 독일군에 공세를 저지한 후 역습을 가할 주력으로 선정된 스텝 전선군에도 40만명의 병력과 1개 기갑군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동원된 소련군의 총 전력은 병력 약 170만, 야포 19,000문, 전차 및 자주포 3,600대(8,000대로 추산하는 설도 있습니다) 항공기 3,100대에 이르는 대규모였고 이는 당시 소련군 전체 병력의 40%, 기갑부대의 75%를 이곳에 배치한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이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했으나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 이었습니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상술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최강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후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러나 성채 작전이 또다시 연기되자, 슬슬 소련군 내부에서도 사기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42년의 그와는 달리 끈기를 보이며 방어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습니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에서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를 보내지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번째 사나이'가 활약하게 됩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소련 정보기관이 포섭한 5명의 대학생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합니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소련군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습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습적인 포격에 의한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아직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 이상 포격이 없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드디어 두 달의 대치 기간이 끝나고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독일군의 기갑 부대는 이 전투 이후로 전략적 공세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비록 소련군의 인명 피해는 독일의 4배, 전차는 거의 7배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으나, 독일군은 쿠르스크 돌출부의 소련군 포위섬멸이라는 작전 목표와 예비대 소모로 전략적 격차를 줄이겠다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실패합니다. 또한 동부전선에 배치했었던 기갑부대 상당수를 잃었습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고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전쟁사가들의 견해가 일치합니다. 만슈타인 역시 자신의 회고록《잃어버린 승리》에서 '작전이 잘 안 풀렸던 상황'이란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이탈리아에 서방 연합군이 상륙하여 더 이상 소련군만 상대할 수 없었고, 전력의 상당부분을 서부전선에도 할애해야 했습니다. 물론 1944년 중반까지 서유럽 전체의 공업지대와 자원을 보유한 나치 독일은 이론상 소련보다 훨씬 높은 전쟁 역량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정작 이런 공업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는 독일에게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독일은 그동안 하계에 실행했던 전략적인 공세 대신 돌출부를 정리하려는 제한적 공세를 벌였고 이를 위해 동부전선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끌어모았으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니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조차 독일군의 능력 밖이라는것이 드러났습니다. 이게 방자가 훨씬 많은 병력과 무기로 적의 공세 위치와 시기를 알고 방어준비를 한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교환비와 전술적 성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음이 확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쿠르스크 전투는 양면 전선이 열리기 직전 불확실한 목표와 의지로 벌인 독일의 마지막 공세였으며 이후 독소전쟁은 소련의 무한공세 속에 선봉부대가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 독일이 전술적 반격을 가해 공세를 멈추고 소강상태가 되는 양상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 이후 드네프르강을 확보하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지만, 1941년 동부전선 개막 직전에도 상주인구가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 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하여 인구 밀집지대에서 징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력 손실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독일군 장병들 사이에서 회의주의, 비관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대승리로 독일군 장병들의 사기는 여전히 높았고, 성채 작전을 준비하던 기간에는 전례없는 엄청난 병력과 장비들이 배치되는 것을 보며 마침내 결정적 전투로 소련군을 완파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고작 1~2주 만에 처참히 후퇴하는 모습은 독일군 장병들의 사기를 추락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물론 후퇴하는 도중 반격해오는 소련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열심히 준비한 회심의 공세는 시작하자마자 금방 실패했고 전선은 뒤로 밀려나버린 게 현실이었습니다. 이는 독일군 SS보안부대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으로, 보고서에서는 휴가 등으로 귀가한 동부전선 출신 병사들에게서 서서히 더 많은 비관적 견해가 관찰된다는 우려를 표했습니다. 여러가지 자료와 회고록으로 볼 때 병사들뿐만 아니라 고급 장교와 독일 국내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 전투의 실패 이후 대놓고 내색만 안 할 뿐이지 전황이 암울하다는 현실을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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